불법과 편법 사이 ‘라벨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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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채연 기자 (mong@fpost.co.kr) 작성일 2019년 06월 25일 프린트본문
#2015년, 한 지상파 뉴스를 통해 패션 브랜드들의 동대문 사입이 도마에 오른다. 도매가격이 26,000원인 여성용 풀오버 니트가 백화점 입점 브랜드 ‘O’에서는 129,000원에, ‘Y’에서는 99,000원에 판매된다는 내용. 브랜드들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산 옷에 높은 가격을 매겨 소비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속임수 판매가 업체 전략이 된 셈’이라면서, 백화점도 이런 관행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 작년 4월에는 중국산 옷을 국산으로 둔갑시킨 6명이 불구속 입건됐는데, 압수품 중 국내 대기업이 전개하는 SPA브랜드 옷이 포함돼 논란이 됐다. 브랜드에게 ODM 방식으로 납품하던 프로모션은 중국 광저우에서 샘플을 사와 브랜드에 제안했고, 브랜드 관계자는 그 중 하나의 샘플을 선택해 700장 오더한다. 프로모션은 ‘메인드 인 코리아’로 라벨갈이 후 납품 직전에 덜미를 잡혔다. 해당 브랜드 측은 단속팀에게 “ODM 거래의 특성 상 라벨갈이 여부를 알 수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진다.
300원짜리 라벨 달면 ‘국산’으로 변신
이달 19일, 중견 디자이너 A씨가 대외무역법위반 혐의로 검거됐다. 그는 중국에서 저가 의류를 사다가 국내에서 직접 제조한 것처럼 허위 표시한 라벨을 붙이는 속칭 ‘라벨갈이’를 하다가 적발됐다.
관세청 부산본부세관이 3월에 첩보를 입수한 뒤 동대문 도매시장 현장조사와 압수수색을 해 형사입건한 것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A씨는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전국 백화점 12개 매장과 가두점을 운영하면서 공급물량이 부족하자 직접 중국에서 수입하거나 사입 업자에게 매입한 뒤 본인 소유 봉제공장에서 라벨갈이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동대문시장에서 1만 원대에 사입한 중국산 티셔츠는 6~7만 원대, 수입가 27만원인 중국산 코트를 130만원에 판매하는 식으로 1년 8개월 여 기간 싼 중국산 의류 6,946벌(시가 약 7억 원)을 국산으로 속여 팔았다.
부산본부세관은 이미 판매된 6,627벌에 대해 과징금 4,400만원을 부과하고, 매장 출고분을 전량 회수해 원산지표시 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은 백화점 입점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악용한 사기극이라며 백화점의 입점업체 원산지 관리감독을 촉구했다.
라벨갈이는 영세 봉제업체가 밀집한 동대문 도매시장 주변과 종로구 창신동 일대에서 주로 이뤄진다. 정부의 단속이 이 지역으로 집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로 새벽시간에 이뤄진다는 라벨갈이 공임은 한 벌 당 300~500원 선으로 알려진다.
상의 200벌 정도 분량의 라벨을 바꿔다는 데 드는 시간은 고작 20~30분. 중국산 옷의 원래 라벨 역시 한 땀 박음질로 뗄 수 있는 속칭 ‘홀치기’로 달아 놓아 처음부터 라벨갈이가 쉽게 공급된다고 한다.
동대문 일대에서 라벨갈이가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시기는 9~12월. 봄, 여름 상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가가 높은 중량 아우터 판매시기에 몰리는 셈이다.
‘라벨갈이’는 불법인가
사실 라벨갈이 자체는 현행법 상 위법성이 없다. 도매상에게서 사입하거나 프로모션에서 완제품 납품을 받을 때 붙어 있던 브랜드 또는 케어 라벨을 떼어 내고, 판매자가 제작한 라벨을 부착하는 일은 문제 삼을 소지가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불법 라벨갈이’가 문제다. 상호와 디자인등록이 되어 있는 상품의 라벨을 임의로 교체하거나, 섬유 혼용률을 비롯해 제조자명(수입자명), 제조국명, 제조일자, 주소 및 연락처, 취급상 주의사항 등 표시사항을 의도적으로 거짓으로 표기하는 것은 불법이다.
디자인 등록된 상품을 복제 또는 위조, 타인의 상표를 무단으로 사용하면 상표법 위반, 중국산(made in China)을 한국산(made in Korea)으로 둔갑시키면 원산지 표기 위반이다. 정부의 근절 의지가 강한 원산지 표기 위반의 경우 대외무역법 상 형사처벌과 행정제재 대상이다.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최대 1억 원이하의 벌금, 최대 3억 원 이하 과장금과 최대 1천만원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다. 신고자에게도 최고 3천만 원의 포상금이 지급된다.
정부 부처와 서울시는 작년부터 불법 라벨갈이 공장이 몰려 있는 동대문 일대를 중심으로 단속을 강화했고 작년 하반기부터 서울시 전 자치구에서 집중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또 중기부, 산업부, 관세청, 서울시, 서울 중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민간추진위원회 등이 모여 ‘라벨갈이 근절 민관협의회’를 구성, 범부처 합동단속도 이뤄진다. 이렇게 적발된 사례만 지난해 21개 업체, 의류 24,244점에 이른다. 올해는 ‘원산지표시 위반자 명단 공표에 관한 지침’이 제정돼 상습위반자에 대한 제재 역시 강화됐다.
관세청은 예전에는 해외 생산지에서 아예 원산지 허위표시를 해 국내로 들여왔지만 최근 통관절차에서 적발되는 사례가 늘어나자 국내 반입 후 라벨갈이 등을 통해 원산지를 조작하는 행위가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패션상품에 대해서는 원산지를 조작해 백화점 입점 브랜드에게 공급하는 업체가 더 있다고 보고 단속 강화 방침을 밝혔다. 2016년 4,324건이던 허위 원산지표시 적발 건수는 올해 5,000건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불법 라벨갈이에 멍드는 동대문
이 같은 상황에도 불법 라벨갈이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단속대상 중에는 ‘저희 가게는 원산지 라벨갈이를 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출입구에 붙여놓고 몰래 원산지 조작을 하다가 적발되는 경우까지 있다.
근본적 문제는 원산지 허위표시와 같은 명백한 불법 행위가 아니더라도 라벨갈이가 동대문 도매시장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동대문 도매상가에서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 제품의 거래량이 늘면서 국내산의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이다. 회전이 빠른 저가 편집숍 브랜드, 온라인 소호몰의 수요가 크다보니 도매상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최저가’로 한정된다.
거래처인 패션기업도 유행 디자인 카피가 심한 탓에 어차피 엇비슷한 디자인이 넘쳐나는데, 도매상이 가격만 맞춰준다면 원산지를 굳이 문제 삼지 않는다.
“보통 동대문에서 완사입 또는 반사입을 하는데, 국내산인지 중국산인지는 주문 포인트가 아닙니다. 우리가 포지셔닝한 시장에서는 같은 가격에 함 땀 박을 걸 두 땀 박은 옷을 공급하는 곳이 아니라 남들보다 500원이라도 싸게 주는 도매상을 찾는 것이 ‘바잉파워’죠. 코트나 특종상품은 아예 광저우로 가 중대물량을 사입해 원가를 낮춥니다.”
여성 편집 브랜드를 운영 중인 B사 상품기획 책임자의 이야기다. 평균 2.5배수에 불과한 마진율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면 동대문에서도 중국산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 국내산이 봉제 품질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브랜드가 아니라 아이템에 집중해 소비하는 요즘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지점은 가격 대비 좋은 품질이 아니라 그냥 ‘싼 가격’이라는 설명이다.
그렇게 중국산에 밀려 국내 일감이 줄어든 영세 소공인들은 라벨갈이 작업이라도 해서 부수입을 올려보려고 한다. 그 노력까지 비난할 수 없지만 단순 반복 작업의 저가 일감에 매달리는 동안 봉제 기술은 약화되고 더욱 영세화되고 있다.
산업부가 예산을 투입해 격년 진행하는 봉제업체 실태조사에서도 지난 5년 간 전국 봉제업체수는 25,000개 수준을 유지했지만 상시 근무자 4인 이하 가내수공업 규모 업체가 크게 늘었다. 2009년 당시 15,296개이던 4인 이하 사업장은 2015년 17,233개로 늘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이와 함께 불법 라벨갈이가 동대문 도매 시장의 이미지를 저급하게 낙인찍을 수 있다는 우려다.
임블리 사태에서도 보았듯이 대중에게 동대문은 국내 최대 홀세일 마켓이자 트렌드 발신지가 아니라 싸구려 저질상품 유통의 온상으로 더 입길에 오르내린다. ‘동대문에서 산 싸구려 옷을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한다’는 식의 비난이다.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속이는 불법 라벨갈이 행위 자체의 심각성 보다 판매자가 원산지를 속이면서 중국산 옷의 소매가격을 3~5배 이상 부풀려 돈을 벌었다는 데에 분노하는 것이다.
원산지 검증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불분명한 문제도 있다. 납품업자가 작정하고 원산지를 속였다고 해서 최종 판매자인 패션 브랜드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동대문 도매상 등을 대상으로 이커머스 컨설팅을 해 온 나유업 브랜드를만드는사람들 대표는 “도매상 스스로 ‘브랜드’라는 인식을 가지고 품질에 책임을 지고, 판매자도 소비자를 대신해 끊임없이 검증을 해야 품질, 카피, 가격거품에 대한 소모적 논쟁을 끝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큐레이션일 뿐’ vs ‘소비자 기망행위’
라벨갈이는 우리 패션업계에서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다.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저가 여성 편집브랜드를 전개하고 있는 C사는 론칭 이후 쭉 라벨갈이를 해왔다. C사 브랜드는 트렌디한 캐주얼 아이템을 중심으로 동대문 시장 사입과 중국 광저우 도매시장에서 사입한 상품을 절반씩 구성하고 있다.
엄밀히 따져 직접 제조한 상품은 재킷과 트렌치코트 등 전체 물량의 10%에 못 미치지만 자체 브랜드로 판매한다. 물론 라벨갈이는 브랜드 라벨을 자사 브랜드로 바꾸고 중국어 또는 영어로 표시된 케어라벨을 한국어로 바꿔 다는 작업이다.
C사의 사업본부장은 “임블리 때도 그렇고 사입은 불법이 아닌데 동대문에서 바잉하는 브랜드들은 불똥이 튈까 몸을 사리고 있다”면서 “원산지 허위 표시라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초점을 맞춰야지 동대문 사입을 싸잡아 의심하고 소비자를 속였느니 하면 패션 사업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소비자가 발품을 팔 필요 없이 큐레이션 해 주는 것이 리테일 브랜드이고, 가격결정권은 리테일러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쇼핑환경과 서비스 수준에 따라 가격변동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C사의 사업본부장 외에도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편집브랜드 관계자들은 수년 전 ‘동대문 물건이 버젓이 백화점에서 브랜드 상품인양 팔리고 있다’는 언론 보도 이후의 해프닝을 떠올리며 씁쓸해 한다.
‘유통 대기업의 부도덕한 행태’로 프레임을 짜고 패션업계 현실을 외면한 당시 언론의 태도, 패션 브랜드를 ‘사기의 공범’으로 치부한 여론에 밀려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때의 사건은 국내 최대 백화점이 ‘점별로 사입 상품을 수시 점검하고, 적발 시 퇴점 조치까지 불사’라는 관리방침을 언론에게 알리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물론 지금까지 사입 상품 때문에 퇴점된 브랜드는 전무하다.
한 백화점 상품본부 여성패션부문장조차도 당시 “설명해 봤자 더 각을 세우려 할 것이기 때문에 언론 입맛에 맞는 액션을 해주고 조용히 지나가자고 협력사들과 협의했다”고 이야기했었다.
현재의 산업, 시장 환경에서 국내 패션 브랜드가 자가 공장을 가지고 모든 아이템을 직접 생산하기란 어렵다 못해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사업성과는 점점 더 제조 기술력 보다 소싱과 마케팅 역량에 무게가 실려 드러난다.
우리 패션업계의 단면을 드러냈던 예전 일화는 ‘동대문’ ‘라벨갈이’ ‘중국산’ ‘백화점 유통’이라는 자극적 단어만이 난무한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시아 패션 트렌드의 정수’라는 위상을 쌓은 동대문이 조금은 더 건강한 체질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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