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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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학림 스트리트캐주얼 ‘FLUX’ 디렉터 (haklim.lee77@gmail.com) 작성일 2021년 09월 13일 프린트본문
2020년 8월, 중국의 스타트업 게임 개발사 ‘게임 사이언스(Game Science Studio)’는 개발 중인 한 게임의 트레일러(Trailer: 게임 시연이나 소개 등을 위한 짧은 동영상)를 공개했고, 이후 세계적으로 꽤 화제가 됐다.
블랙미스: 오공
그동안 중국은 대대적으로 모바일 게임에 집중해왔음에도 자체적인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 재산권)를 창조해내기보다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게임의 시스템이나 형태를 베껴 만든 듯한 게임들을 찍어 낸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때문에 시장은 엄청나게 크지만, 콘텐츠 수준을 놓고 보자면 딱히 자랑할 만한 것들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년에 선보인 ‘블랙미스: 오공’은 가장 중국적인 콘텐츠인 ‘서유기’를 주제로 삼고 있고, 그동안 억울하게 일본에 팔려가 에네르기파(가메하메하)를 쏘는 일본 캐릭터로 소비되던 손오공의 ‘진짜 캐릭터’를 훌륭한 그래픽으로 구현해냈다.
게임 속에서 손오공은 근두운을 타고 날아다니고, 위험 지역에선 꿀벌로 둔갑해 싸우기 버거운 상대들을 피해 유유히 도망갈 뿐 아니라, 여의봉으로 상대방을 속 시원하게 후려 패는 등 영화로만 접해오던 화려한 중국식 액션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서양권 문화, 특히 게임이나 영화 속에서 일본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쌓여온 수많은 데이터가 증명하듯 하나의 장르가 됐다.
그 실체와는 별개로 닌자나 사무라이, 일본식 정원 같은 오랜 것들부터 사이버 펑크나 하라주쿠, 야쿠자에 이르기까지 이색적인 부분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거품까지 낀 채로 재해석에 재해석까지 더해져 일본은 동양이 아닌 ‘일본’이라는 고유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을 만큼 잘 알려진 것도,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문화적 호기심을 담아 미국의 게임 개발사인 서커 펀치 프로덕션(Sucker Punch Production)은 2020년에 오픈월드 액션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Ghost of Tsushima)’를 내놓았다.
1274년 원나라의 대마도 원정이 배경으로 플레이어는 원나라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전멸한 와중에 홀로 살아남은 사무라이 ‘사카이 진’이 되어 몽골군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게임은 올해 3월까지 총 650만 장의 판매를 기록했고, 실사 영화 제작도 결정되는 등 흥행에 대성공했으며, 지난달에는 확장팩까지 발매되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2021 게임스컴
올해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독일 쾰른의 쾰른메세(Koel nmesse)에서는 세계 3대 게임쇼 중 하나인 2021 게임스컴(Gamescom)이 열렸다. 코엑스의 7.8배에 달하는 면적의 전시관을 모두 사용해왔던 점을 고려하면 이 게임쇼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온라인으로만 열린 이 게임쇼에는 수많은 세계 유명 게임회사들이 참여해서 새로 나온 게임과 앞으로 새로 나올 게임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전 세계 게이머들의 눈길을 끈 게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의 게임업체인 펄 어비스(Pearl Abyss)의 ‘도깨비(Dokev)’였다.
도깨비는 ‘수집형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쳐’를 표방하는 게임으로, 당시 공개된 영상을 제외하면 어떤 게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별로 없기에 게임 자체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이른 감이 없진 않다.
실제로 개발 단계에서 큰 기대를 받다가 출시 이후로 기대에 못 미치는 완성도를 보여 흥행에 크게 실패하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가능성이 완성된 게임에서도 구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가려운 곳들을 정확히 긁어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DokeV’가 보여주는 것들
도깨비를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그래픽부터 게이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만드는 여러 가지 디테일들, 확률성 아이템 뽑기 같은 비슷비슷한 게임만을 찍어내듯 만들어 내고 있는 국내 게임 업계의 상황을 벗어나려 노력했다는 점 등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오늘날의 ‘한국’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게임의 트레일러는 경쾌하고 전형적인(?) K-Pop과 함께, 어린아이가 산에서 돌 위에 작은 돌을 올려 놓으면서 손 모아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트레일러를 본 수많은 유튜브 스트리머들은 한결같이 첫 장면을 보자마자 ‘어? K-Pop?’이라며 깊은 관심을 갖는다.
이어지는 게임 플레이 영상에서는 이 게임의 맵 이곳저곳을 볼 수 있는데, 어디에도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라고 적혀있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눈에는 너무 익숙한 수많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신호등의 모양과 색깔, 자동차 도로의 폭이나 주정차 구역의 컬러, 이정표의 모양, 길거리의 한옥들과 한국식 주택들, 언덕진 마을과 어촌마을의 풍경과 여기저기에 있는 산들까지 우리 눈에는 무척 친숙한 한국의 풍경들이자 외국인들 눈에는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들.
귀를 울리는 중독성 강한 K-Pop 음악과 한국의 이런저런 풍경들 사이로 어린이 캐릭터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도,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누비기도 하고, 때로는 알파카까지 타고 다니면서 ‘도깨비’를 찾아내 싸우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하면서 모험을 즐기는 것 같다.
즉, 이 게임에는(적어도 공개된 트레일러 상에는) 한글 간판이나 대한민국 국기같이 다소 고압적으로 한국임을 드러내는 어떤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것조차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현대의, 2021년의 대한민국을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어 보인다!
이 게임의 4분짜리 트레일러 영상을 본 해외 게이머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재미있어 보이고 꼭 해보고 싶다”는 것.
이러한 모습은 최근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많은 한국의 콘텐츠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K-Pop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이 음악을 미국식 팝 음악의 냄새가 나긴 나는데 딱히 똑같지는 않다고 하고, 일본음악과도 비슷한 듯 다르다고 평가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이 냄새도 저 냄새도 나는데 그렇다고 정확히 그 냄새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표현하면서, 그런 음악을 K-Pop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한국의 영화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곤 한다. 분명히 카메라 앵글이나 흐름 등은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흔적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것도 아닐뿐더러 어떤 부분들은 너무 다르게 풀어낸다는 것. 그래서 결국 할리우드 영화와는 구분되는 어느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게임이 보여주는 한국의 모습들도 사람들의 흥미를 강하게 자극한다.
해태상과 한옥들 사이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질주하며 미래적인 자동차들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올라 스파이더맨처럼 광선 끈을 던져 날아다니다가 우산을 쓰고 글라이딩을 하면서 갓을 쓴 새(찾아보니 설화에 나오는 ‘어둑시니’라고 한다.
이미 갓은 넷플릭스 ‘킹덤’을 통해 세계적으로 큰 인기몰이를 한 적이 있다)를 잡으러 다니고, 연을 날리거나 조선 임금의 옷을 입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거나 롱보드를 타다가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를 잡기 위해 청소기를 들고 고스트 버스터즈처럼 적을 빨아들이는 이 정신없는 모습이 정확히 외국인들 눈에는 ‘2021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일 것이다.
중국은 이제 스스로 ‘서유기’를 시각적으로 멋지게 구현해내는 수준에 이르렀고, 일본은 아직도 사무라이와 닌자, 80년대 사이버 펑크로 자신을 보여주는 사이에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신들의 유산을 훌륭하게 재해석하고 가공하는 중국과 일본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뿐더러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 그 어느 나라도 ‘2021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유독 대한민국만이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더욱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P.S
게임스컴에서 트레일러를 공개한 직후 제작사인 펄어비스의 주가는 지난 26일 하루 25.6% 상승했다고 한다. 혹시 30년 전에 삼성전자 주식을 사놓지 못한 자신을 탓한다면, 또 5년 전에 비트코인을 왕창 사놓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있다면, 어쩌면 당신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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