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섬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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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채수한 기자 (saeva@fpost.co.kr) 작성일 2020년 06월 16일 프린트본문
소재 통합, 경쟁 구도…희미해지는 차별성
안타까움은 결국 소비자들의 몫
한섬은 국내 토종 패션 기업을 대표한다. 타임, 마인, 시스템, SJSJ, 타임옴므, 시스템옴므로 이어지는 하우스 브랜드 라인업은 웬만한 국내 기업들이 넘볼 수 없는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다.
브랜드 역사도 하루 이틀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1988년에 마인을 시작으로, 1990년 시스템, 1993년 타임, 1997년 SJSJ, 2000년 타임옴므, 2008년 시스템옴므가 론칭됐다. 마인과 시스템은 30년이 넘었고, 가장 최근 론칭한 시스템옴므도 10년이 넘었다.
한국 패션 역사상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각 분야에서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유지해 온 기업이 있을까.
정재봉 회장이 자식 같은 한섬을 현대그룹에 넘겼어도 브랜드 가치는 그대로 유지됐을까?
현대가 맡은 지 7년이 지났지만 한섬의 명성은 그대로인 듯 보였다. 이는 숫자가 말해준다.
한섬은 현대 인수 직 후 5천억 원 수준이었던 매출이 지난 2018년 1조원을 돌파했고, 지난 해에는 1조 3천억원에 달했다. 한 해 동안 30%가 넘는 매출이 증가했다. 물론 한섬글로벌, 현대G&F를 합병한 효과도 있지만, 실제 매출도 상승했다.
한섬의 기둥, 타임과 시스템
이렇게 잘 나가는 한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현재 한섬의 매출을 이끌고 있는 브랜드는 타임과 시스템이다.
타임은 지난해 약 1,200억 원, 시스템은 약 8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두 브랜드는 당연히 한섬의 대표 브랜드다.
한섬 브랜드들의 최고 강점은 디자인과 제품력이다. 고급 소재와 수준 높은 봉제, 탁월한 디자인력은 누구도 쉽게 따라 올 수 없는 그들의 공통 강점이다.
각 브랜드마다 디자이너들이 스무 명이 넘고, 매 시즌 가장 좋은 디자인을 선별해 최종 출시 제품을 결정한다. 각 브랜드별로 소재의 차별성과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의 특성이 분명하게 나눠져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강점과 차별 포인트가 점점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다. 브랜드 색이 흐려지고, 매년 비슷한 디자인이 나오는 것 같다는 말들은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같은 상황에서도 한섬의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신장하고 있다. 외형이 늘어가는 한섬의 모습을 보며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은 왜일까.
현대의 기업 문화
사실 한섬의 신장은 현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백화점은 유통 대기업이다. 유통사가 아무리 패션에 가치를 두고 있다 해도 결국은 숫자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한섬은 현대 인수 이전 매출이나 숫자에 얽매이지 않았다. 매년 비슷한 수준의 매출을 유지했다. 어느 해 폭발적으로 매출이 신장하거나 줄어들지도 않았다.
평균이라도 맞추듯 한섬 브랜드들은 요동 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트렌드를 주도했다.
한섬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영업부와 디자인부서는 함께 회의를 하지 않았다. 영업부는 매출을 높이기 위해 디자인실에 압력을 넣을 수 없었고, 디자이너들은 매출에 상관없이 가장 좋은 디자인을 뽑아냈다”고 말했다.
사실 통상적인 패션 브랜드를 보면 트렌드에 따라 유행하는 제품을 만들고 이를 통해 매출을 올린다. 영업부에서는 잘 팔릴 만한 옷을 만들라고 디자인실에 요청한다.
사실 브랜드 매출이 안 나오면, 사업부장은 디자인실을 탓하고, 심지어 디자인실 수장을 교체하기도 했다. 매출이 안 나오는 책임은 디자인 탓이었다.
그러나 한섬은 그렇지 않았다. 매출이 나오든 안 나오든, 디자인실에 가해지는 외부 영향을 차단시켰고, 디자이너들은 숫자에 상관없이 브랜드 가치를 지켜가며 매 시즌 신선한 디자인을 내놓았다.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입으면 고급스러운 그런 옷 말이다.
지금은 어떨까? 현재 한섬의 임원은 디자인실을 제외하고 모두 현대백화점 출신으로 바뀌었다. 인수 당시 고용 승계되어 넘어온 임원 중 남아있는 사람은 타임옴므 이종호 상무뿐이다.
지금의 한섬 내부에서 영업부가 디자인실에 관여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현재 브랜드들의 디자인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 제품에 대한 평가들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소재 통합 소싱
현대에 인수된 이후 2018년 한섬은 소재 통합 소싱을 추진했다.
타임과 시스템, 랑방컬렉션 3개 브랜드가 일부 같은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타임에서 쓰고 남은 원단을 시스템이 쓰고, 랑방컬렉션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복 多브랜드를 운영하는 전문 기업에서 소재 통합은 사실 금기사항 중 하나다.
한 중견 여성복 담당 임원은 “여성복 브랜드를 여러 개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재를 통합 사용하면 제품이 다 비슷해지고, 소비자들은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당장은 원가 절감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멀리 본다면 고객은 떨어져 나가고, 브랜드 가치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에서 한섬으로 넘어 온 생산 담당 임원은 소재 통합을 진행했고, 타임과 시스템은 소재를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원활하게 이뤄지지는 못했다.
타임과 시스템의 디자인실을 맡고 있는 임원들은 한섬 초창기부터 함께한 멤버이다. 여성복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렉터들이 소재 통합 소싱을 달가워했을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시스템 사업부에서 타임 제품을 카피해 서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디자인 자부심이 남다른 한섬 안에서 서로 디자인을 카피했다며 얼굴을 붉혔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흔들리는 타깃과 콘셉트
맏언니 타임은 론칭 30년이 다 되어 간다. 고객들도 함께 늙어간다. 오래된 브랜드가 가진 딜레마를 타임이라고 비껴갈 수는 없다. 타임의 고민은 어떻게 새로운 고객을 계속 유입하느냐다. 기존 고객을 유지하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타임은 젊어지기 위한 움직임을 서서히 시도했다. 젊어져야 새로운 고객이 유입되고 매출이 늘어날 것이라는 단순 발상이 아니었기를 바래본다.
반대로 ‘시스템’은 고급화를 원했다. 수입 브랜드 수준의 고급스러움과 영캐주얼 보다는 한 단계 높은 브랜드 퀄리티를 추구했다. 맏언니를 따라잡고, 외형도 가장 큰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시스템은 고급 소재를 사용 비중을 높였고 일부 제품들은 가격이 올라가기도 했다. 타임은 젊어지고, 시스템은 고급화하고, 두 브랜드 사이에서 고객들은 혼동을 가져오기도 했다. 한 소비자는 “타임이나 시스템이나 큰 차이가 없어진 것 같다. 사실 타임만을 고집했던 이유는 타임만의 스타일, 소재, 딱 떨어지는 핏 등인데 점점 차별성이 떨어진다면 굳이 타임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타임과 시스템의 소재 통합 소싱은 원가를 절감하고, 단기적으로는 매출의 상승효과도 가져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브랜드 콘셉트를 최대 강점으로 갖고 있는 두 브랜드가 이런 방식으로 매년 운영된다면 결국 어떻게 될까. 내부에서도 이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더한섬하우스.>
경쟁 구도
多브랜드 기업에서 브랜드 간 경쟁은 불가피하다. 잘 되는 사업부와 안 되는 사업부의 사내 입지나 경영진의 대우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오는 브랜드의 사업부장과 만년 적자인 브랜드의 사업부장 중 누구를 승진시킬까.
숫자를 기준으로 패션 비즈니스를 평가하는 문화는 이미 만연하다. 이를 두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시장의 논리는 잘 하는 자와 못 하는 자를 구분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한섬은 여러 가지로 많이 다른 기업이었다. 한섬 정재봉 회장은 브랜드 간 경쟁을 금지했다. 매출에 따라 브랜드를 차별 대우하지 않았고, 외형이나 수익에 따라 인사 고과를 반영하지 않았다. 수익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좋은 소재를 쓰고, 좋은 디자인을 내고, 브랜드 가치를 지켜나가는 방향을 택했다.
이미지와 가치에 투자했다. 매출이 작은 브랜드라도 꿀리지 않았고 자신만의 색깔대로 브랜드를 운영해 나갔다. 한섬이 30년 넘게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균형 있게 유지해 온 비결이었을까.
무너진 마인과 SJSJ
현대로 넘어 온 후 한섬의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한 번 보자.
타임의 동생 같은 마인은 지난 해 200억 원 남짓 한 매출을 올렸다. 마인은 2014년까지 만해도 600억 원대 매출을 유지했다. 백화점 42개점에서 올린 매출이다.
SJSJ도 마찬가지다. 마인보다 가격대는 다소 낮았지만 2014년 기준 백화점 46개점에서 59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사실 마인과 SJSJ는 맥을 같이한다. 마인은 여성스러운 정장 분위기에, 예복으로 입을 법한 단아한 느낌의 옷을 주로 팔았다. SJSJ는 마인보다 캐주얼하고 젊은 느낌이다. 타임과 시스템이 모던한 라인이라면 마인과 SJSJ는 페미닌 스타일을 대표했다고 볼 수 있다.
마인과 SJSJ의 하향세는 트렌드의 영향도 크다. 전체적으로 정장 무드가 지고, 캐주얼 트렌드가 오면서 두 브랜드는 서서히 외형이 줄어들었다.
내부적인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브랜드 간의 경쟁 구도는 결국 브랜드 색을 희미하게 한다. 한 회사 한 식구 인데 언니를 이겨야 하고, 내가 더 커야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아래 서로 경쟁하는 것은 경영진에서 볼 때는 바람직할 수도 있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 성장해 나간다면 나쁠 리 없다. 그러나 매출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잘 팔리는 옷을 만들어야 하고, 경쟁 브랜드에서 만드는 옷을 따라해야 하고, 매출을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색을 내는 디자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히 오게 되어 있다.
경쟁 구도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브랜드는 서서히 도태되게 되어 있다. 내가 못한다 생각하면 더 못하게 되고, 비교 당하면 주눅 들게 된다. 정확히 그런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미 예견됐던 일
사실 한섬이 현대에 인수된 순간부터 패션계는 알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어날 일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믿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패션 업계 각 분야에서 트렌드를 리드하고 20년 넘게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어벤져스 같은 브랜드들이 모인 한섬이 대형 유통사로 넘어갔더라도, 현대가 한섬의 브랜드 가치를 잘 지켜주기를 누구나 바랐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참으로 오래 버텼다. 정재봉 회장이 인수된 후 2년 간 경영을 맡았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고, 정 회장이 손을 놓은 후 지금까지 5년 동안에도, 이렇다 할 잡음 없이, 브랜드 가치에 대한 변질 없이 잘 왔다.
한 여성복 전문 업체 임원은 “인수 이후 3년 안에 한섬이 무너질 것으로 봤다. 그러나 한섬의 브랜드 가치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7년 동안 알게 모르게 잘 이어져 왔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운영 관련 문제도 하나 둘 씩 불거지고 있다. 견고히 쌓아 온 성벽이 바닥부터 스며 든 물로 인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무너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안타까움
한섬이 1등 자리를 지켜내든 말든, 잘 되든 말든,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든 말든 경쟁사들이나 관련 업체에 피해는 전혀 없다.
아쉽고 안타까운 정도일 뿐이다.
정작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될 사람들은 한섬의 브랜드를 좋아하고, 평생 입어왔던 소비자들일 것이다.
타임에서 200만 원 상당의 코트를 사 입는 사람들은 결코 300만 원이 없어서 타임의 코트를 산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비싼 수입 브랜드나 명품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해 온 타임의 가치를 믿고, 좋아했기 때문에 타임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타임의 가치가 떨어지고, 소재는 획일화되며, 타 브랜드와의 차별성이 떨어진다면, 소비자들은 굳이 타임을 선택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같은 운영이 계속된다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떠나는 소비자들의 마음도 안타까울 것이다.
“좋은 브랜드였는데….”
당장 타임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비단 타임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다. 한섬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에 이런 내용도 있었다.
‘디자인 돌려막기나 하지 말아라. 타임옴므 작년이랑 올해랑 옷이 똑같음. 장난치냐’
안타까웠다. 한섬 브랜드는 이런 댓글이나 받을 만큼 부족한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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