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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용어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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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현 에프씨엘코리아 대표 (fclkorea01@gmail.com) | 작성일 2020년 07월 13일 URL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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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는 문화적 깊이를 나타낸다. 풍성한 어휘는 그 사회에서 해당 분야의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또 얼마나 다양하게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지 척도가 된다.

 

얼마 전까지 필자는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족들에게는 흰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백 가지 있다’고 한 말을 믿었다. 책과 방송에서 본 북극은 온 천지가 흰 색이었다. 북극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런 곳에서 흰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백 개라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북극곰도 흰 색, 눈도 흰 색, 얼음도 흰 색인 곳에서는 ‘흰 색’하면 그것이 어떤 흰 색을 말하는 것인지 구분되어야 했으리라. 흰 북극곰이 나타났는데, 흰 눈더미로 알아들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테니까.’

 

이런 논리가 머릿속에서 전개됐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환경과 문화에 따라 어휘는 다양하게 발달하는구나.’

 

하지만 이 사실은 신문기사를 통해 산산이 깨어졌다. 이누이트족이 수백 가지 흰 눈 낱말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 것은 1911년 인류학자 프란츠 보애스 탓이라고 한다. 다음은 그 오해를 설명한 기사원문이다.

 

‘이누이트의 언어는 포합어로 교착성이 강하다. 동사에 접미사, 형태소 같은 것이 주렁주렁 달려서 띄어쓰기 없는 하나의 문장상당어(sentence word,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경우)를 형성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Tusaatsiarunnanngittualuujunga’는 ‘듣다’라는 뜻의 ‘Tusaa’에 많은 접미사를 붙여 만든 “나는 잘 들리지 않아”라는 문장상당어다. 이런 식이면 이누이트족은 모든 사물이나 동작에 대해 수백 개씩의 단어를 갖는 셈이다.’(이코노미인사이트, 2017년 3월 1일, 곽윤섭, 뭐라 꾸며대도 흰 눈은 ‘흰 눈’)

 

수백 가지 표현의 흰 눈은 그들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심지어 필자가 주워들은 단어는 ‘눈’도 아닌 ‘흰 색’이었으니 잘못 알고 있어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

 

어휘 다양성의 의미

이 해프닝은 이누이트족의 언어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됐지만 그렇다고 다양하고 풍성한 어휘가 가진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폄하하지 않는다.

용어가 생기고 그 의미가 정의됐다는 것은 사물과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집단따돌림을 의미하는 ‘이지메’란 단어가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우리나라에는 집단따돌림이 없었는데 일본에서 ‘이지메’란 단어가 들어오면서부터 청소년 사이에 집단따돌림 현상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집단따돌림은 있었다. 하지만 ‘왕따’나 ‘이지메’로 용어가 통용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화자(한병태)가 ‘엄석대’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이 주요 줄거리이다. 

 

일본의 ‘이지메’란 단어가 알려지고, 우리에게 ‘왕따’란 용어가 생겨난 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인 인식이 생기고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용어가 정의되고 어휘가 발달하는 것은 해당 문화가 그만큼 발달하고 성숙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되는 어휘의 다양성은 매우 중요하다,

 

국내 패션계의 글 ‘보그병신체’

그럼 우리나라 패션계는 얼마나 많은 용어가 정의되어 있고, 어휘가 발달했을까?

여성복 업체서 근무하던 시절, 품평회에서 디자인실장의 상품을 설명하던 것을 떠올려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 원피스는 엘레강스하며 매우 여성스럽게 디자인된 제품입니다. 실루엣이 특히 우아합니다.” “다음 제품은 모던한 스타일의 재킷입니다. 매우 시크하며 트렌디합니다.”

 

계속해서 이어진 상품 설명은 위 용어들에 단지 몇 개의 단어가 추가된 조합의 반복이었다. 디자인 실장이 상품 설명을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몇 개 없었다. 당시 품평회를 참관했던 인턴이 끝난 후 내게 물었다. “모든 옷의 설명이 다 똑같던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큰 기대와 호기심을 갖고 품평회를 참석했던 인턴은 몇 개의 단어로 모든 옷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다.

 

국내 브랜드의 콘셉트 설명이나 시즌 테마를 표현하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거의 모든 브랜드가 동원한 단어와 어휘는 몇 개 안 된다. 모두가 거기서 거기인 용어를 사용하고, 단어 돌려막기와 순서 조합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표현한다.

 

사용하는 용어도 거의 외래어와 귀화어이다. 브랜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조사밖에 없다. 그래도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션계의 글을 ‘보그병신체’라 부르며 조롱한다.

 

패션 문화의 균형 잡힌 성장 필요

풍부한 어휘가 해당 문화의 발달과 깊이 정도를 나타낸다면 우리나라 패션 문화는 매우 아쉽다. 심지어 생산과 봉제 용어는 거의 모두가 일본어이다. 세계 의류시장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우리나라 패션산업계의 위상에 비해 이런 실상이 부끄럽다.

 

패션산업에서 쓰는 모든 단어가 한국어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패션산업이 점점 발달했는데도 용어가 빈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산업의 크기에 비해 깊이가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의 데이터 분석 컨설팅 기업인 글로벌 데이터(Global Data)는 최근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3년 세계 10대 의류 시장 판도에서 한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9위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의 의류 소비 시장 규모가 크긴 하지만 이것이 한국 브랜드들의 경쟁력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한국 패션문화는 질적으로도 성장을 이뤄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패션 용어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해질 것이다.

 

경력사항

  • 現) ㈜FCL KOREA 대표
  • 現) 호서대/동서울대 패션디자인학과 강의
  • 現) 유통/패션기업/정부기관 교육기획 및 강의
  • 前) 글로컬 대구침장 특화산업 육성사업 자문위원
  • 前) ㈜보그인터내셔날 보그너 CDO
  • 前)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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